너가 잘 되기를 바래(사도행전 13:44-45)
다음 안식일에 비디시아 안디옥의 온 시민이 거의 다 회당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44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듣고자 함입니다. 일주일 동안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 복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나누고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돈이 마음에 있으면 늘 돈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한 말이 나오게 됩니다. 내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내 주인입니다. 내가 섬기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라고 말을 해도 돈 이야기, 주식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만 나온다면 재물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들 마음 속에 채웠습니다. 그러기에 일주일 동안 쉼없이 말씀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전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놀랐겠죠. 그래서 궁금해서 회당에 모인 겁니다. 도대체 어떤 말씀인가?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웅장했겠습니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보며 그 마음에 감동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45절에 보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였다 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데 바울과 바울은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 부러워하면 됩니다. 그리고 인정해야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부러워하지도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러 왔습니다. 복음에 뭔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기가 나니까 그 복음을 무조건 반대했습니다. 진리를 거부한 것이죠. 이것이 성령훼방죄입니다. 말씀을 거부한 것이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시기의 위험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가 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엉뚱한 판단을 하죠. 그래서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시기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당시 인류의 1/4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울왕도 시기로 다웃을 향해 창을 던지고 자신을 살려주던 다윗을 끝까지 죽이려고 추적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도 시기했습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시기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고집이 세지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시기가 발생한 시점에서도 나는 내가 옳다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아니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시기가 없는 상황, 부러움이 없는 상황이라면 판단력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기가 있다면 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시기하지 말라! 이 말씀을 뒤집으면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 입니다. 이웃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의 지위와 가진 것에 대해서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혹여라도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없애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미워하고 시기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모습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만 나올 수 있는 모습, 구별된 거룩한 모습이죠. 그것은 바로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잘 될 때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남의 자식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게 되면 마치 내 자식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마음을 담아 축하해 줘야 합니다. 이웃이 높은 지위를 갖게 되거나, 사업에 성공하면 오히려 내가 기뻐하며 밥 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냈는 데 이웃의 의견이 더 많은 지지를 받으면 기쁨으로 나도 그 생각을 따라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징은 나의 유익이 아닌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자들이 다 예수님께로 갈 때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대한 고백을 했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웃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할 때 그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넘치게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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